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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길로틴 사형 (1977년까지):인도주의와 잔혹함 사이의 역사

by 달콤한슈가 2025. 10. 29.

프랑스는 인권과 자유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역설적으로 길로틴은 오랫동안 프랑스의 사형 집행 수단이었다. 이 장치는 단두대라고도 불리며, 머리를 한 번에 절단하는 기계이다.
길로틴은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자, 동시에 근대적 인도주의적 처형 방식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잔혹함과 상징성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1977년 마지막 사형이 집행된 뒤 1981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 글에서는 길로틴의 탄생 배경과 변화, 그리고 사형 폐지로 이어지는 역사를 세 가지 소제목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프랑스의 길로틴 사형;프랑스의 에펠탑
프랑스의 길로틴 사형;프랑스의 에펠탑

길로틴의 탄생: ‘더 인간적인’ 처형을 위한 기계

18세기 후반, 프랑스는 계급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이 극심하였다. 귀족은 칼이나 검으로 ‘품위 있는’ 사형을 받았고, 평민은 교수형, 화형, 바퀴형 등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적 분노를 키웠고, 형벌의 평등화와 인도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조제프 이냐스 길로탱 박사이다. 그는 의사이자 정치인이었으며, 1789년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한 방식으로, 고통 없이 사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제안에 따라, 인체 해부학에 기초한 단두대형 기계가 고안되었다.

1792년 4월, 길로틴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의 의뢰로 제작된 실제 기계가 완성되었고, 이때부터 이 장치를 ‘길로틴’이라 불렀다. 아이러니하게도, 길로탱 본인은 이 장치의 발명자가 아니었고, 그 사용에도 반대했지만, 그의 이름이 영원히 단두대와 연결되었다.

길로틴의 도입은 혁명적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며, 인간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합리적 사형 방식”으로 평가받았다. 프랑스 혁명기(1789~1799) 동안, 이 기계는 평등과 정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곧 그 상징은 공포로 바뀌게 된다.

 

혁명기의 공포와 길로틴의 일상화

1793년부터 1794년까지, 프랑스는 ‘공포정치’라는 암흑기를 맞이했다.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반혁명 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대규모 처형이 진행되었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당시 혁명 광장)에는 매일같이 단두대가 설치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유명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도 길로틴으로 처형되었다. 뿐만 아니라, 혁명 세력 내부의 인물들까지 숙청되면서, 길로틴은 정치적 도구이자 공포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이 시기에는 “단두대의 날개가 돌아간다”는 표현이 생길 정도로, 처형은 일상적이었다. 혁명광장 주변에서는 빵을 팔거나, 관람객이 몰려드는 ‘공개 처형 쇼’가 벌어졌다. 당시 파리 시민들은 길로틴을 단순한 형벌 도구가 아니라, 정의의 상징 혹은 대중 오락으로 여겼다. 하지만 혁명 이후 세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은 이 잔혹한 광경에 피로감을 느꼈다. 19세기 중반으로 가면서 길로틴은 더 이상 “혁명의 상징”이 아니라, 국가 폭력의 상징으로 변해갔다.

 

근대국가와 마지막 길로틴: 20세기의 사형 논쟁

19세기 후반, 프랑스는 공화국 체제를 확립하고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사형 제도는 여전히 존속했고, 길로틴은 계속 사용되었다. 다만 혁명 시기의 공개 처형은 1939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그전까지는 사형이 일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신문에는 “단두대가 새벽에 세워졌다”는 기사가 실리곤 했다.

1939년 이후에는 교도소 안에서 비공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길로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통적 절차’로 남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점점 인권과 인도주의를 강조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여러 나라가 사형을 폐지하기 시작하였으나, 프랑스는 비교적 늦게까지 이 제도를 유지했다.

1977년 9월 10일, 튀니지 출신 이민자 하미다 젤루드가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근처의 보메 교도소에서 길로틴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범죄는 납치와 살인이었지만, 이 처형은 프랑스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많은 시민과 인권 단체가 “21세기에 가까운 시대에 단두대를 사용하는 것은 야만적이다”라고 비판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81년, 프랑스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주도로 사형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로베르 바당테르는 “국가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연설로 큰 울림을 주었다. 이로써 길로틴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길로틴이 남긴 역사의 아이러니

길로틴은 처음에는 인도주의적 개혁의 산물이었다. 사람의 고통을 줄이고, 신분에 상관없이 ‘평등한 사형’을 실현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계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공포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길로틴의 역사는 인간이 ‘정의’와 ‘잔혹함’ 사이에서 어떻게 갈등하는가를 보여준다. 문명화된 처형을 꿈꿨지만, 결국 그 기계는 인간의 폭력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1977년 마지막 길로틴이 멈춘 순간은 단두대의 종말이자, 인권 의식이 성숙한 문명 사회로 나아가는 전환점이었다.

오늘날 프랑스의 길로틴은 박물관 유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차가운 칼날은 여전히 묻는다 —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