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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의 이스라엘 전쟁 5차 중동 전쟁으로 번질까? 중동 전쟁의 시작은?

by 슈페솔 2025. 6. 15.

이스라엘은 지난 13일 이란의 군·핵시설 공격을 시작으로 이란 국방부 등 주요 시설을 선제 타격했다. 이에 이란도 반격에 나서며 이스라엘 최대 도시 텔아비브 등을 향해 200여발의 탄도미사일과 드론을 발사하는 등 보복 공습에 나섰다. 사흘 째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 전쟁이 5차 중동 전쟁의 발발은 아닌지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는 가운데, 1차에서 4차까지의 중동전쟁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이스라엘과 아랍의 격돌 : 중동전쟁의 흐름과 의미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중동 지역은 끊임없는 전쟁과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다. 특히 20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벌어진 4차례의 중동전쟁은 이 지역의 지정학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뿌리를 형성했다.

 

 

제 1차 중동전쟁 (1948-1949) : 이스라엘 독립과 아랍의 반발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과 아랍인의 두 국가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대인들은 이를 수용했지만, 아랍국가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후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고, 다음 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등 아랍 국가들이 일제히 이스라엘을 침공하며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양상은 혼돈 그 자체였다. 이스라엘은 초기에는 열세였으나, 무기 확보와 병력 동원에 성공하며 반격을 시작했다. 특히 무기 지원을 받은 유대인 민병대와 후발 입국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합류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유엔이 제안한 것보다 더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요르단은 서안지구(웨스트뱅크)를, 이집트는 가자지구를 점령했고, 팔레스타인은 독립국가 수립에 실패하게 된다. 이 전쟁으로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며 중동 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

 

 

1차 중동전쟁의 전개--> https://youtu.be/STii6p1Tm8k

 

제1차 중동전쟁 - 나무위키

 

제1차 중동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뒤 영국 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에서 손을 떼게 된다. 무주공산 이 된 팔레스타인

namu.wiki

 

 

제 2차 중동전쟁 (1956) : 수에즈 위기와 강대국의 개입

두 번째 전쟁은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직접적인 충돌이라기보다, 이집트와 서방국가(영국·프랑스), 이스라엘 간의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전의 성격이 강했다. 당시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며 서방의 반발을 샀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통해 이집트를 침공했고, 곧이어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했다. 이들은 명분상으로는 운하의 중립성을 회복하기 위해 개입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이익과 나세르 정권 약화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강한 반발로 인해 전쟁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은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를 비판했고, 소련은 군사 개입을 경고했다. 결국 유엔이 중재에 나서며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는 철수, 이집트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은 군사적 승패보다는 냉전 하에서 강대국의 이해가 어떻게 중동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제2차 중동전쟁 - 나무위키

 

제2차 중동전쟁

파일:British soldiers supervising a crowd in Port Said, Egypt, w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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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차 중동전쟁 (1967) : 6일 만에 바뀐 중동의 지도

제3차 중동전쟁은 ‘6일 전쟁’으로도 알려져 있다. 당시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인근 시나이 반도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이스라엘 선박의 티란 해협 통행을 차단했다. 요르단과 시리아도 이에 동조하며 중동 전역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이스라엘은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1967년 6월 5일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불과 6일 만에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를,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을,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공군의 우위로 신속히 마무리되었지만, 그 결과는 장기적인 불안정성을 초래했다. 팔레스타인 영토 대부분이 이스라엘에 점령당하면서 국제 사회의 우려가 커졌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42호 결의안을 통해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를 촉구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안보상 이유로 철수를 거부했고, 점령지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시작하면서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이 전쟁은 중동 지도를 완전히 바꿔놓았고, 오늘날 팔레스타인 분쟁의 가장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3분 만에 보는 3차 중동전쟁--> https://youtu.be/grg_HROGG1Q

제3차 중동전쟁 - 나무위키

 

제3차 중동전쟁

파일:Israeli troops and military vehicles manoeuvre on the outsk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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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차 중동전쟁 (1973) : 욤키푸르의 기습과 석유전쟁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는 유대인의 가장 신성한 명절인 욤키푸르(속죄일)을 노려 이스라엘을 기습했다.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되찾기 위해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초반에는 아랍군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고, 이스라엘은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 지원과 예비군 동원을 통해 이스라엘은 점차 반격에 성공했고, 전쟁 말기에는 다시 골란고원과 시나이 대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이 전쟁의 가장 큰 특징은 군사적 충돌 외에도 석유를 무기로 사용한 ‘석유전쟁’이었다. 전쟁 후, OAPEC(아랍 산유국)은 이스라엘을 지지한 미국과 서방국가에 석유 수출을 금지하며 유가를 폭등시켰다. 이로 인해 전 세계는 1차 석유파동에 휘말렸고, 중동의 전략적 가치가 더욱 부각되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었고, 이후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평화협정(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제4차 중동전쟁 - 나무위키

 

제4차 중동전쟁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침공하여 발생한 전쟁이다. 개전일이 유대교 전통의 대속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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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이 남긴 유산

1차부터 4차까지의 중동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민족, 종교, 식민지 유산, 강대국 정치가 얽힌 복잡한 갈등이었다. 이 전쟁들을 통해 이스라엘은 생존을 확보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했지만, 동시에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평화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또한 이 전쟁들은 중동이 국제정치의 중심 무대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고, 전 세계의 안보, 경제, 외교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바로 이 시기의 역사적 결정들이 남긴 결과라 할 수 있다.

중동 평화를 위한 해법은 단순한 군사력이나 협상만으로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이들 전쟁이 남긴 상처와 교훈은 크고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