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세금”이라고 불린 정책이 있다.
바로 17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에서 시행된 ‘창문세’이다.
이 세금은 말 그대로 건물의 창문 개수에 따라 부과된 세금이었다.
오늘날로 보면 황당하게 느껴지지만,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사람들의 생활을 어둡게 만들고,
결국 도시 풍경과 건축 양식까지 바꿔놓은 정책으로 기억된다.

왕의 재정난이 낳은 기발한 세금
17세기 말, 영국은 전쟁과 정치 혼란으로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해 있었다.
특히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즉위한 윌리엄 3세는
프랑스와의 전쟁(나인스 전쟁, 1688~1697)에 막대한 군비를 지출해야 했다.
그 결과 국고는 빠르게 고갈되었고, 새로운 세수가 절실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소득을 직접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재산의 규모’를 눈에 보이는 지표로 판단했다.
즉, 집이 크고 창문이 많을수록 부유한 사람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1696년, 윌리엄 3세 정부는 새로운 세제를 도입했다.
그것이 바로 ‘창문세’였다.
세금 구조는 단순했다.
기본 세금이 부과된 뒤, 창문의 개수에 따라 추가 금액을 냈다.
예를 들어, 10개 이하의 창문이 있는 집에는 소액의 세금이,
20개 이상인 대저택에는 높은 세금이 부과되었다.
당시에는 이 제도를 ‘재산세의 간접적 형태’로 여겼기 때문에
일반 국민의 소득을 직접 조사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즉, 정부는 “창문이 많을수록 세금을 더 낸다”는 단순한 논리로
효율적 세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함이 오히려 큰 부작용을 불러왔다.
빛을 막는 세금, 어두워진 영국의 집들
창문세가 시행되자 영국 사회 곳곳에서는
이 정책의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건축의 형태였다.
부자들은 세금을 줄이기 위해
집의 창문을 일부 벽돌로 막거나, 처음부터 적게 짓기 시작했다.
런던과 옥스퍼드의 오래된 건물들 중에는
지금도 벽돌로 막힌 창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바로 당시 창문세의 흔적이다.
‘빛을 본다는 것은 곧 세금을 내야 하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도시의 많은 집들이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게 되었고,
특히 서민층 주택은 더욱 어두워졌다.
당시 영국의 신문에서는 이런 풍자 문구가 돌았다.
“가난한 자는 햇빛조차 사치품이 되었다.”
어두운 실내는 위생 문제로 이어졌다.
18세기 후반, 의사들은 창문세가
결핵과 같은 전염병의 확산을 악화시킨다고 경고했다.
햇빛과 환기가 부족한 밀폐된 공간에서
건강이 악화된 사례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병원과 수용소, 학교까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창문을 줄이는 바람에
공공 위생 수준이 크게 낮아졌다.
이로 인해 창문세는 점점 ‘건강을 해치는 세금’,
‘가난한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하는 정책’으로 비판받기 시작했다.
시대의 변화와 창문세의 종말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빠르게 변모했다.
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위생과 주거 환경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이 시기 들어 정부는 창문세를 점차 조정하기 시작했다.
세율을 완화하거나 예외 조항을 추가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1840년대에 들어서면서 언론과 사회단체들의 비판이 거세졌다.
의사협회와 공중보건 운동가들은 “창문세는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햇빛과 공기를 얻기 위해 세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이
시민들의 상식에 어긋난다고 본 것이다.
1848년에는 ‘공중보건법’이 제정되면서
깨끗한 주거 환경이 국민의 권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제 시대는 “어둠 속의 건강”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1851년, 영국 의회는 오랜 논란 끝에
창문세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재산세’였다.
이는 개인의 소득과 실제 부동산 가치에 기반한 과세로,
현대적인 조세 체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창문세 폐지 이후 영국의 건축 양식은 다시 변화했다.
19세기 중후반의 빅토리아 시대 건물들은
넓고 커다란 창문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단순한 미적 취향이 아니라,
오랜 세월 억눌린 ‘빛에 대한 해방’을 상징하는 변화였다.
빛의 가치와 조세의 교훈
영국의 창문세는 오늘날에도
정책이 국민의 삶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당시 정부는 세수를 확보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국민의 건강과 생활의 질을 희생시켰다.
이 세금은 사람들에게 “햇빛은 공짜가 아니다”라는 역설을 남겼다.
그러나 동시에, 창문세의 실패는
공공의 이익과 개인의 복지 사이의 균형이
정책 설계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깨끗한 공기와 빛을
인간의 기본적 권리로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 권리가 과거에는 세금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남아 있다.
창문세의 폐지는 단순한 세금 제도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에 대한 사회적 자각의 시작이었다.
빛을 되찾은 영국의 창문들은 이후
산업화 시대의 도시를 환하게 비추는 상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