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하는 나라로 꼽힌다.
하지만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정부는 오히려 출산 억제를 국가 정책으로 추진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진 대한민국의 가족계획 정책(Family Planning Policy)은
경제 성장의 뒷받침을 위해 국민의 ‘출산 행동’까지 통제했던 대표적인 인구 정책이었다.
이 시기의 가족계획 정책은 단순한 피임 장려 운동을 넘어,
국가가 직접 “가정의 규모”와 “자녀 수”를 결정하려 한 사회적 실험이었다.
이 글에서는 그 배경과 추진 과정, 그리고 그 후유증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인구 폭발과 경제개발의 불균형
1950년대 한국은 6·25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채, 폐허 속에서 재건을 시작한 시기였다.
하지만 전쟁 후 출산율은 급격히 높아졌고,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가 등장했다.
1955~1963년 사이 출생률은 여성 1인당 평균 6명에 이를 정도였다.
식량, 주택, 교육, 의료 등 모든 사회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 같은 인구 증가는 국가 경제의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때 정부는 인구 증가를 ‘빈곤의 원인’으로 보고,
인구 억제 없이는 산업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962년, 박정희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가족계획 사업”을 공식 국가정책으로 채택했다.
보건사회부 산하에 가족계획실이 설치되고,
전국 각지의 보건소에는 피임 홍보원과 간호요원이 배치되었다.
정부는 슬로건을 통해 국민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이 문구들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당시 정부가 국민의 삶의 방식을 직접 설계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가족계획의 실제 추진 방식과 변화
1960~70년대 가족계획은 “피임 보급과 불임 시술 장려”를 핵심으로 했다.
정부는 전국의 보건소를 통해 콘돔, 자궁 내 장치(IUD), 경구 피임약 등을 무료로 나눠주었다.
또한 농촌 지역에는 ‘이동 가족계획 반’이 운영되었다.
이들은 트럭을 타고 마을을 돌며 주민들에게 피임 교육을 실시하고,
심지어 현장에서 불임 시술(정관수술, 난관결찰)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정부는 피임 실적을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각 시·군·면 단위 공무원들은 “몇 명이 피임했는가, 누가 불임 수술을 받았는가”를 보고해야 했고,
성과가 좋을수록 상을 받았다.
반대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인사상 불이익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여성에게 불균형하게 집중되었다.
여성의 몸이 국가 정책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시골 여성들은 ‘가난을 피하기 위해’ 혹은 ‘정부 권유로’ 불임 시술을 받는 일이 흔했다.
이 과정에서 부작용이 발생해도 의료 지원은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를 근대화의 성과로 내세웠다.
1970년대 중반, 정부는 “가족계획 성공으로 인구성장률이 절반으로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1960년대 초 3%를 넘던 인구 증가율은 1980년대 초에는 1%대로 낮아졌다.
정부는 이를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기반”으로 평가하며,
‘산아제한’은 곧 ‘근대 국민의 의무’라는 인식을 사회 전반에 퍼뜨렸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도시화, 여성의 교육 수준 향상,
그리고 사회구조 변화와 맞물리며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 시작했다.
저출산의 씨앗과 사회적 후유증
1980년대 들어 한국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뤘고,
소득 수준과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출산 억제’ 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1982년에도 “하나로 충분하다”, “둘도 많다”는 구호가 사용되었다.
심지어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작은 가족이 행복한 가정’이라는 문구가 실렸다.
하지만 시대는 이미 변하고 있었다.
도시화와 교육 확대, 여성의 직장 진출 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출산율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1983년 출산율은 2.1명으로 ‘인구 대체 수준’에 도달했고,
이후로도 하락세는 멈추지 않았다.
정부는 뒤늦게 위기감을 느끼고 1990년대 초
정책 방향을 ‘출산 억제 → 출산 장려’로 전환했다.
하지만 이미 국민의 인식 속에는
“많이 낳으면 가난해진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즉, 1960~80년대의 가족계획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인구 억제에 성공했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초저출산 구조를 만드는 데 기여한 셈이다.
또한 여성의 몸을 정책의 도구로 삼았던 점,
가난한 계층에 불임 시술이 집중된 점 등은
오늘날 인권적 관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가 ‘인구’를 관리 대상으로 삼은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이후 등장한 교육정책, 보건정책, 복지정책 등에도
이 시기의 “국가 주도형 인구관리 모델”이 깊은 영향을 남겼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에서 ‘낳아야 산다’로
1960~80년대의 가족계획 정책은
가난을 극복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정부는 국민 개개인의 삶 속까지 개입하며
‘출산’이라는 사적 영역을 공적 목표로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 한국은 짧은 기간 안에 인구 증가율을 안정시켰고,
산업화와 도시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권 문제, 젠더 불평등,
그리고 장기적인 저출산 문제의 씨앗이 함께 뿌려졌다.
오늘날 정부는 다시 “아이를 낳자”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지만,
한 세대 전 정부가 주도했던 ‘출산 억제’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가족계획 정책의 역사는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국가의 발전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의 삶의 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출산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과 선택의 영역이어야 한다는 것을.